
“그 어느 것보다 한 개인의 취향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음료.”
컬리의 미식가를 위한 뉴스레터, ‘에피큐어’는 커피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 표현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원두의 산지, 가공법, 로스팅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만큼, 커피는 알면 알수록 훨씬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음료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커피는 어렵기도 합니다. 알아야 즐거움이 커진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진입 장벽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커피는 ‘큐레이션’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이런 커피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큐레이션 공간, 2025 코리아 커피위크 제주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굳이 여행 중 커피 페어에 간 건
언젠가부터 여행을 갈 때 꼭 찾는 곳 중 하나가 카페가 된 것 같습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저에게 여행지의 카페를 고르는 일은 단순한 계획을 넘어, 하나의 즐거운 작업이 되었죠. 특히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커피의 향과 맛을 경험하는 건, 여행의 큰 의미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의 유명 스페셜티 카페를 한 곳씩 들르는 것이 오래된 취미가 되어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늘 아쉬움은 남았습니다. 좋은 카페는 많은데, 여행 일정은 늘 한정적이니까요. 동선상 들르지 못하거나, 여러 곳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상황이 자주 생기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올해 4월,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잡힌 일정이었지만, 문득 코리아커피위크가 떠올랐습니다. 실력 있는 스몰 카페 브랜드들이 모이는 커피 애호가들의 축제 같은 행사였는데요. 뉴스레터 ‘까탈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서울 행사 표는 이미 매진되어 아쉬움을 삼켰던 기억이 있었죠. 왠지 제주 행사라면 표가 남아 있지 않을까 싶었고, 다행히 표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가족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굳이 제주까지 와서 그런 행사에 가야 해?” 하는 눈치였죠. 하지만 아시나요? 제주도는 전국에서 인구 대비 카페가 가장 많은 지역입니다. 실력 있는 로컬 카페들도 자연히 밀집해 있고요. 게다가 코리아커피위크도 제주에서 먼저 열리고, 이후 서울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서울 카페들은 언젠가 들를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제주 로컬 카페를 한자리에서 만날 기회는 흔치 않겠죠.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오프라인 공간이든 시간을 내어 찾아야 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아커피위크 제주는, 여행 중 시간을 내서라도 들를 이유를 충분히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커피 취향이란, 생각보다 더 어렵기에
가야 할 이유는 명확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걱정도 있었습니다. 좋은 카페들이 아무리 모여 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인상 깊은지는 전혀 다른 문제니 까요. 더군다나 저뿐만 아니라 커피를 저만큼 좋아하진 않는 아내와, 이런 행사에 낯선 부모님까지 함께 모시고 가는 거라 은근 긴장이 되었습니다.
보통 커피 취향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카페에 가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거예요. 산미 있는 원두와 없는 원두 중에서 고르라는 질문 말이죠.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커피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합니다. 원두 산지부터 가공법, 로스팅 방식까지, 선택지는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니까요.
저 역시 커피를 좋아하긴 하지만, 마니아라 부를 만큼 해박하진 않습니다. 그나마 커피 맛에 눈을 뜨게 된 건 앤트러사이트 커피에서 진행한 2회 차 수업 덕분이었습니다. 커피의 맛을 구별하는 방법과 드립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죠. 당시 바리스타 한 분이 대여섯 명의 수강생과 2시간 동안 깊이 교감하며 진행한 소규모 수업 덕분에, 몰입도가 상당했고요.
먼저 커피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작은 종이컵에 내린 커피를 계속 바꿔가며 시음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향과 맛이 달라지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죠. 덕분에 이후로는 커피 맛을 조금이나마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좋아하는 산지와 향도 찾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번처럼 큰 행사에서는, 커피에 큰 관심이 없는 일행들이 그때처럼 섬세한 변화를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남았습니다. 4시간 넘게 집중해야 겨우 맛의 세계를 맛볼 수 있었던 경험을 떠올리면, 커피에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은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니까요.
맛이라는 본질만 남겼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엔 모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양손에는 무겁게 구매한 원두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런 만족감을 만들어 준 건 행사 기획과 바리스타들의 세심한 큐레이션 덕분이었습니다.
솔직히 행사가 열린 제주특별자치도 소통협력센터 건물은 특별하지 않다 못해, 오히려 이런 페어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건물은 5개 층으로 구성돼 있었고, 전시 공간은 1층과 5층으로 나뉘어 있었죠. 엘리베이터가 두 대 있었지만, 이동 동선은 자연스럽지 않았고 개별 공간들도 넉넉하지 않았죠.
개인적으로도 수직적 공간은 선호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이죠. 대표적인 훌륭한 매장 경험 사례로 꼽히는 애플스토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국내 애플스토어는 모두 단층 구조입니다. 문턱 없는 넓은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상품을 체험하도록 유도하죠. 최근 주목 받는 오프라인 리테일러 다이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이소 매장의 출점 조건 중 하나가 300평 이상의 단층 공간일 정도니까요.

코리아커피위크는 이러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경험 설계에서 핵심만 남기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커피 맛을 보는 것 외에는 별도의 이벤트나 체험 요소가 거의 없었죠. 각 테이블에서는 오직 커피를 내리고 잔에 담아주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렬한 것도 없었습니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커피를 시음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바리스타들과 짧지만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여느 페어에서는 인지도가 높거나 사은품을 많이 주는 부스에 사람이 몰리기 마련인데요. 커피위크에도 유독 인기 있는 부스가 있었지만, 시음이라는 본질이 모두 같아 대기 시간이 지나치게 길거나 경험을 방해하는 일은 적었습니다.
행사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시음잔 역시 단순히 상징적인 요소가 아닌 실질적인 경험 향상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주 흙으로 만든 도기를 각자 받아 계속 세척하며 사용하는 방식이었는데요. 쓰레기를 줄인다는 친환경적 의미도 있었지만, 손이 자유롭다는 실용성 또한 돋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일회용 잔을 사용하면 쓰레기를 들고 있거나 자주 버려야 하는 불편함이 생기는데, 좁은 공간에서 여러 개의 쓰레기통을 둘 수도 없었죠. 하지만 이 방식 덕분에 하나의 세척 공간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동 동선이 단순해지고, 사람들의 흐름이 꼬이는 일도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더욱이 그 자체로 이번 행사를 추억할 수 있는 기념품 역할을 하기도 했고요.

또한 작지만 세심하게 설계된 개별 부스들의 경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들렀던 브루잉세리머니 부스에서는 커피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안내했습니다. 단순히 바로 마시는 게 아니라, 향을 먼저 맡고 입에 머금은 뒤 넘기면서 풍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죠. 여기에 더해 먼저 열렸던 서울 행사에서 제주로 보낸 메시지들까지 더해져 제대로 환대 받으며 코리아커피위크 첫 시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키커피와 88로스터스가 함께 준비한 부스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곳은 다른 부스보다 대기 시간이 길었는데요. 커피를 향의 강도 순서대로 배치해, 차례대로 비교하며 맛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실 커피는 미묘한 맛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커피위크처럼 다양한 원두를 짧은 시간 안에 맛볼 때는 더욱 그렇죠. 하지만 이를 고려한 배려 덕분에 하나씩 천천히 맛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그만큼 만족도도 컸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커피뿐 아니라 커피와 어울리는 음식들을 소개하는 부스들도 일부 있어서 커피만 마셔서 쓰린 속을 달래주기도 했는데요. 제주라는 지역색이 잘 드러나는 현무암 모양의 초콜릿을 맛볼 수 있었던 구아오 쇼콜라. 제주 현지에서 생산된 원유 만을 사용하는 더밀크 등, 로컬의 특색이 담긴 부스들이었다는 점에서 전체 경험과 잘 어우러져 더욱 좋았습니다.

어느새 양손이 무거워졌습니다
이번 행사가 더욱 인상적이었던 건, 평소 커피는 사서 마시거나 캡슐 커피로만 즐기던 저마저도 원두를 구매하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전환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이런 행사가 처음이던 부모님까지 양손 무겁게 원두를 들고 돌아가셨죠. 사실 취향을 알기 전에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원두를 사는 일이 막막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수십 잔의 스페셜티 커피를 맛보면서 자연스럽게 취향이 좁혀졌고, 어느새 원두를 사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정판’이라는 타이틀은 결정적인 트리거가 되었습니다. 코리아커피위크를 위해 기존에 없던 특별한 원두를 준비한 카페들이 많았는데요. 행사 이후 다시 구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구매를 망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재고를 보니 마음이 더 급해졌습니다. 게다가 현장 할인까지 더해지자 결국 구매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매장 경험은 자연스레 구매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항상 즉각적인 구매만을 이끌어내는 건 아닙니다. 만족이 당장의 소비가 아닌 미래의 방문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이번 코리아커피위크 역시 즉각적인 판매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커피의 매력을 발견하고, 나중에라도 자연스레 이곳에서 만난 카페들을 다시 찾도록 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번 현장에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맞물려 즉각적인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유독 많았습니다. 행사장 안에서 빈손보다는 원두 하나라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더 많이 눈에 띈 이유기도 했죠. 어렵게만 느껴졌던 커피의 세계를 맛이라는 본질에 집중한 환경과 친절한 큐레이션 덕분에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 구매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커피를 알아가고 즐겼던 많은 이들은, 아마도 앞으로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카페를 찾게 될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코리아커피위크는 단순한 페어가 아니라, 앞으로의 커피 생활까지 바꿔놓은 잊지 못할 큐레이션의 순간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 코리아커피위크는 2023년부터 열린 커피 애호가들의 축제와 같은 행사로 올해 3회차를 맞이하였습니다. 올해는 1월 시드니&멜버른, 3월 서울, 4월 제주에서 열렸습니다. 내년 행사 정보는 공식 인스타그램을 팔로워하고 받아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