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 좋은 기분을 퍼뜨린 비결에는 세심함이 있었습니다

2025.06.23

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

“성북동을 소개하는 방송에서, 아직 문 연 지 세 달밖에 안 된 아이스크림 가게가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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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라이트

지난 6월 10일, SBS 예능 프로그램 ‘틈만나면,’의 성북동 편이 방영됐습니다. 한 동네를 구석구석 탐방하는 콘셉트인 만큼, 장소 선정에도 신중함이 느껴지는데요. 그런 점에서 성북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녹기 전에 낱점’이 등장한 건 조금 의외였습니다. 염리동이라면 모를까, 성북동 기준으로는 이제 막 들어온 새 얼굴이니까요.

‘녹기 전에 낱점’은 이미 잘 알려진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의 2호점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곳이 2025년 3월 1일에 문을 열었다는 점이에요. 방송 당시 기준으로 고작 석 달 된 신입 가게가 어느새 성북동을 대표하는 공간 중 하나가 되어버린 셈이죠.

더욱이 ‘녹기 전에’는 아이스크림의 맛도 맛이지만,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따뜻한 접객으로 더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접객의 분위기가 과연 ‘낱점’에서도 이어지고 있을까 궁금해져서, 직접 성북동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습니다.

이름부터 공간까지, 의지를 이어갑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녹기 전에 낱점’의 오픈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두 가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는 ‘낱점’ 이라는 낯선 이름, 다른 하나는 ‘퍼블릭 오픈’이라는 독특한 개념이었죠. 오픈 소식을 알리는 게시물이 올라온 건 4월 1일이었지만요. 실제로 문을 연 건 한 달 전인 3월 1일. 이미 한참 운영 중인 가게였다는 점이 흥미로웠죠.

우선 이름부터 살펴볼까요? ‘낱점’은 이 공간의 전 주인이 운영하던 밀크티 가게 ‘낱’에서 유래했습니다. ‘녹기 전에’는 단순히 매장을 늘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간이 지닌 의지까지 이어받는 방식의 확장을 고민해 왔다고 해요. 인테리어와 기물뿐 아니라, ‘낱’이 지녔던 태도와 감정까지도요. 그래서 ‘2호점’이 아닌 ‘낱점’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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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모습을 보면, 지금의 ‘녹기 전에 낱’이 가진 이름의 뜻을 단번에 이해 가능합니다 ⓒ낱 인스타그램(@nnnot______)

‘퍼블릭 오픈’에 앞서 한 달 동안 진행된 ‘로컬 오픈’도 브랜드의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로컬 오픈’은 ‘녹기 전에’가 만든 개념으로, 정식 영업을 하되 온라인에서는 별도로 알리지 않는 방식입니다. 그저 동네 사람들만 자연스럽게 ‘발견’하길 바란다는 취지였고요. 그런 면에서 정말 ‘녹기 전에’ 다운 선택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실제로도 잘 작동했습니다. 개업 선물로 염리동을 상징하는 ‘소금’을 나눠 친분을 쌓았고, ‘로컬 오픈’ 기간 동안 포장 손님에게 “얼마나 걸리셨어요?”라고 물으면 늘 돌아오는 대답은 “금방 왔어요”였다고 합니다. 근처에서 들러 가는 가게라는 뜻이죠. 이 짧은 대화에서 ‘낱점’이 어느새 동네의 일부가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방송에서 성북동 대표 공간으로 소개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겁니다.

☞ ‘녹기 전에 낱점’의 상세한 오픈 스토리는 [낱점일기]를 보면 아실 수 있습니다

자랑인 가게가, 동네를 자랑합니다

 ‘녹기 전에 낱점’은 문을 열기 전부터 ‘좋은 가게’, 더 나아가 ‘우리 동네의 자랑’이 되기를 꿈꿨다고 합니다. 실제로 직접 방문했던 날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요. 얼핏 보기에도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온 듯한 손님들이 많았고, 이미 동네를 북적이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실감할 수 있었죠.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녹싸’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진 박정수 대표가 직접 쇼케이스 앞을 지키고 있었어요.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니, 익히 알고 있던 요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곳곳에 놓인 귀엽고 재치 있는 소품들, ‘좋은 기분’을 권하는 가게다운 섬세함이 묻어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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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소품들 사이 성북동과 관련된 콘텐츠들의 존재감은 더욱 유별났습니다 ⓒ트렌드라이트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눈에 띈 건 ‘성북동’이라는 동네의 존재였습니다. 책장에는 성북동에 관한 책이나 성북동 주민이 쓴 책들이 꽂혀 있었고, 천장에는 ‘2025 성북밀로 지도’가 붙어 있었죠. 빵과 국수가 유명한 성북동의 미식 지도를 담은 인쇄물이었습니다.

사실 ‘녹기 전에’의 시작은 익선동이었지만, 이후 비교적 한산한 염리동으로 자리를 옮기며 브랜드의 기준도 바뀌었습니다. 단순한 핫플이 아닌, 생활감 있는 동네에 있어야 지속 가능한 가게가 된다는 판단이었죠. 염리점은 대학가라 보기엔 애매했지만, 서강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이 가까워 학생들의 유입이 꾸준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특성을 살려 ‘녹기 전에’는 동네와의 연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예컨대 서강대, 연세대, 이화여대의 개교기념일에 맞춰 레이어드 메뉴를 출시하는 방식이었죠. 지금도 가게 입구에는 ‘서강 후원의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을 만큼, 지역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있고요.

‘녹기 전에 낱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성북동에 스며들고 있었어요. 퍼블릭 오픈 이후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지자, ‘성북동의 자랑거리’를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방식을 택한 거죠. 그래서 가게 곳곳에 성북동을 담고, 동네의 매력을 알리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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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영수증 이벤트 등 ‘녹기 전에’는 동네에 녹아 드는데 열심입니다 ⓒ녹기 전에 인스타그램(@before.it.melts)

아쉽게도 직접 참여하진 못했지만, 4월 중순부터 약 2주간 진행되었던 성북동 영수증 이벤트도 눈에 띄었습니다. 성북동 가게의 영수증을 보여주면 아이스크림 10% 할인을 해주는 행사였는데요. 근처 가게들과의 상생은 물론, 동네를 알리는 계기도 되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영수증을 받으며 거기 음식은 어떤지, 어디 있는 가게인지 등 소소한 대화 주제가 또 생겨서 좋았다고 하고요.

대화를 해보면 진가가 드러납니다

혹시 이렇게 혹시 가게에 갔을 때, 그 공간을 지키는 분과 직접 대화를 나눠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미 책『좋은 기분』을 읽고, 아직 가보지도 않은 ‘녹기 전에’의 팬이 되어버린 터라, ‘낱점’을 방문하기 전부터 뭐라도 꼭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운 좋게도 그날은 마침, 그 유명한 ‘녹싸’님이 눈앞에 계셨고요.

사실 거창한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습니다. 처음 방문한 자리였기에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추천을 부탁 드렸고, 혹시나 싶어 챙겨간『좋은 기분』에 사인을 받을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쭤본 정도였죠. 그런데 이 짧은 순간이 꽤 인상 깊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 ‘과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친절하다’는 걸 밝은 미소, 정중한 말투, 과한 서비스로 오해하곤 하잖아요. 하지만 그런 친절은 때로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반면 ‘녹기 전에’의 접객은 매뉴얼이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고 담백했습니다. 무던하지만 무심하지 않고, 따뜻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그런 응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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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을 고르며 나눈 짧은 대화에서도 ‘녹기 전에’가 가진 매력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트렌드라이트

추천 과정에서는 오히려 세심함이 도드라졌습니다. 매일 바뀌는 메뉴 중 유일하게 항상 있는 이천쌀맛을 먼저 소개했고, 식사를 마친 뒤라면 과일 계열을, 신맛을 좋아한다면 라임을 추천해 주셨죠. 그 짧은 대화 안에서도 손님의 취향을 살피고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사인도 흔쾌히 해주셨고요. 책에서 읽었던 ‘접객의 힘’을 아주 잠깐이지만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더 받아 들고는, 가게에 앉아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손님들은 정말 끊이지 않고 들어왔고, 대부분은 여느 맛집처럼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곧바로 나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녹싸님과 짧은 인사를 나누거나, 반가운 듯 대화를 주고받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참 인상 깊었어요. 단순히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을 넘어, 누군가에게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 ‘녹기 전에’가 말하는 ‘좋은 기분’과 ‘좋은 삶’을 아이스크림을 통해, 또 그 짧은 접객을 통해 조금씩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거든요.

깊이 있는 철학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녹기 전에 낱점’을 다녀온 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싸님이 없는 ‘녹기 전에’는 과연 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특별한 접객의 감각은, 사람이 달라져도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궁금증을 안고 이번엔 1호점인 염리점을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지점은 분명 있었습니다. 근처에 일이 있어 몇 번 들렀는데, 어떤 날은 프런트에 계신 분의 목소리가 너무 작게 들려 살짝 당황했고, 다른 날엔 동행이 “시그니처 메뉴가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저희는 시그니처가 따로 없습니다”라는 다소 딱딱한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죠.

그럼에도 ‘녹기 전에’ 다운 순간들은 여전히 생생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염리점은 낱점보다 더 붐비는 매장이었고, 공간도 조금 더 아담했습니다. 회전율이 빠른 와중에도 손님들은 끊임없이 줄을 서 있었고요.

그때 한 손님이 아이스크림 세 개를 받아 들고 혼자 나가려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문을 열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 순간 프런트 직원이 “제가 열어 드릴게요”라며 자연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바쁜 와중이었고, 요청도 없었지만 말이죠. 그 장면이 유독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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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한편에 놓여 있던 때 묻은 『좋은 기분』처럼  깊게 박힌 철학은 오래 남는 법입니다 ⓒ트렌드라이트

어쩌면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그런 디테일이야말로 이 브랜드의 철학을 보여주는 증거 아닐까요. ‘좋은 기분을 주는 접객 가이드’를 160페이지에 걸쳐 만들고, 이를 토대로『좋은 기분』이라는 책까지 펴낸 브랜드다운 장면이었습니다. 직원마다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뿌리 깊은 철학만큼은 흔들림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죠.

이번 글을 준비하며 여러 번 ‘녹기 전에’를 찾았는데, 그때마다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의외로 ‘너무 마음에 드는 맛’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다음에 오면 없을 것 같아 아쉬웠지만, 아이스크림을 무한정 먹을 순 없었기에 결국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죠. 그러자 동행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어차피 다 못 먹는 거, 지금 이 순간을 즐겨.”

그 말에 문득, 녹싸님이 왜 아이스크림을 브랜드의 주제로 삼았는지 떠올랐습니다. 시간과 아이스크림은 모두 흘러가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는 말이었죠.

게다가 ‘녹기 전에’의 메뉴는 매번 달라지지만, 그 안에서 이천쌀 맛만큼은 언제나 자리를 지킵니다.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이 변하겠지만, 어떤 건 계속 남는다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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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녹기 전에’의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답니다 ⓒ트렌드라이트

지금만 누릴 수 있는 아이스크림, 다정한 동네, 그리고 그 너머의 ‘좋은 기분’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녹기 전에’를 한 번쯤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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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 창작자. 매주 2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받아보는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 에서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책 <기묘한 이커머스 이야기>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