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 뛰어난 몰입감은 우리가 재즈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2025.07.24

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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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라이트

한때 인터넷 밈으로 떠돌던 이 문장은, 사실 197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비롯된 실제 일화에서 생겨난 건데요. 당시 사회자가 재즈의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에게 “재즈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라고 요청하자, 그녀는 말 대신 즉흥적인 스캣(scats)으로 대답했습니다. 설명 대신 노래로, 말이 아닌 리듬으로. 음악이란 본디 그렇게 말보다 감각으로 전해지는 것이라는 걸 보여준 순간이었죠.

도쿄에 있는 재즈바 블루노트는 바로 그 ‘감각’에 집중한 공간입니다. ‘재즈바’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상 공연장에 가까운 이곳은, 재즈를 중심에 두되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다녀온 사람마다 극찬을 아끼지 않아 저 역시 궁금함이 커졌고, 실제로 그 공간이 음악을 어떻게 큐레이션 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직접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블루노트는 1981년 뉴욕에서 시작된 재즈 클럽입니다. 이후 LA, 하와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지점을 두었고요. 그중 블루노트 도쿄는 아시아 최초로 1988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허비 행콕, 팻 메스니 같은 재즈의 거장들은 물론, 존 메이어 같은 팝스타까지 무대에 올랐을 만큼 이곳은 오랜 시간 세계적인 공연장이자 명소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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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공간은 입구부터 원하는 분위기로 방문객을 몰입시키는데, 블루노트 도쿄가 그러했습니다 ⓒ트렌드라이트

입구부터 분위기는 남달랐습니다. 재즈의 거장들이 담긴 흑백 사진이 시선을 압도했고, 이어지는 대기 공간은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무드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입장이 가능했지만, 그보다 훨씬 이른 시간부터 관객들로 가득 차 있었죠. 정장을 갖춰 입은 직원들은 조용하고 정중한 태도로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고요. 그 순간부터 이미 공연은 시작된 것 같았습니다.

좋은 음악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선 단순히 귀로 듣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감각은 공간에서, 분위기에서 시작되죠. 어두운 조명, 클래식한 무드, 적당히 낡은 듯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블루노트 도쿄는 우리가 재즈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었고, 그 몰입감은 그대로 공연까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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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하면서도 정갈한 직원들의 태도에서부터 음악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트렌드라이트

그래서였을까요. 무더운 여름날임에도 캐주얼한 복장보다 정성껏 차려입은 관객들이 더 많았습니다. 실제로 과거엔 드레스 코드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별다른 규칙이 없음에도 관객 모두가 ‘공연을 즐기겠다’는 진심 어린 태도로 준비해 온 듯했습니다.

이처럼 블루노트 도쿄가 오랜 시간 재즈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의 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좋은 몰입은 준비된 공간과 관객이 함께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곳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음악을 위해 불필요한 건 덜어냈습니다

블루노트 도쿄는 예약 없이 갑자기 찾아가서는 볼 수 없는 곳입니다. 음악이 중심인 공연장이기 때문인데요. 티켓 가격은 누구의 공연이냐,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명한 아티스트일수록 공연료가 비싸고, 좌석도 위치나 형태에 따라 추가 요금이 붙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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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공간은 음악의 생생함을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정말 콤팩트하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블루노트 도쿄

가장 고민됐던 건 좌석을 고르는 일이었습니다. 추가 요금이 없는 카운터석부터 가장 비싼 박스석까지, 여러 후기를 찾아가며 한참을 비교했어요. 그 과정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일부 좌석을 빼고는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다는 거였습니다. 좌석 간 간격도 넉넉하진 않았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다”라는 후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만의 목소리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불편함’이 음악을 더 가까이, 더 깊이 경험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죠. 공간을 타이트하게 구성한 덕에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는 훨씬 짧아졌고, 몰입감은 그만큼 커졌습니다. 처음엔 어색했던 동석자들과도 공연이 시작되면 어느새 같은 감상자가 되었던 거죠. 이처럼 공연에 방해될 요소는 과감히 덜어내고, 오직 음악을 위한 구성만을 남긴 이 설계는 결과적으로 아주 효과적으로 보였습니다.

관객은 물론 가수까지 매료시킨 ‘거리’

관객 입장에서 블루노트 도쿄는 정말 더없이 만족스러운 공연장이었습니다. 300석 남짓한 규모와 콤팩트한 구조 덕분에,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정말 가깝거든요.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거리감은, 그야말로 ‘라이브’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경험이었죠. 그리고 동시에 이런 물리적 거리감이야말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무대를 찾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가 다녀온 날은 R&B와 소울 장르의 거장, 피보 브라이슨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조금 낯설 수 있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의 대표곡 ‘A Whole New World’와 <미녀와 야수>의 ‘Beauty and the Beast’를 부른 바로 그 가수입니다. 1951년 생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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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 브라이슨은 ‘디즈니가 사랑한 남자’라 불리는 유명 아티스트로, 가수 박정현과 듀엣 무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KBS

​그런데 그는 등장부터 남달랐습니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객석을 돌며 관객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건넸거든요.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는 순간이라니, 시작부터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이후에도 노래 중간중간 짧은 토크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관객과 교감했고요. 때로는 관객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함께 노래를 이어가기도 했죠.

 하이라이트는 역시 디즈니 주제곡 두 곡을 부르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두 곡을 라이브로 듣는 감동도 컸지만, 피보 브라이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 관객 세 명을 무대 위로 초대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마지막 마무리까지 맡긴 건데요. 듣는 이의 귀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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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규모가 작고 무엇보다 무대가 정말 가까웠기에 가수와의 교감이 정말 잦았습니다 ⓒ트렌드라이트

이 모든 장면이 가능했던 건 결국 ‘거리’였습니다. 아티스트와 관객이 물리적으로 가까이 앉아 있다는 것, 그것이 주는 몰입감과 감동은 그 어떤 무대 장치보다도 강력했죠. 어쩌면 블루노트 도쿄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진짜 이유는, 무대 위 스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이토록 자연스럽게 좁혀주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기반이 탄탄해야, 꽃이 피는 법입니다

물론 아무리 좋은 무대가 준비되어 있어도, 매주 유명 아티스트를 무대에 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블루노트 도쿄가 이렇게 오랜 시간 무대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그 뒤에 재즈를 사랑하는 일본 관객들, 즉 단단한 시장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겠죠.

실제로 블루노트 도쿄 무대에 오르는 많은 아티스트들은 단지 저녁 공연 하나만을 위해 일본을 찾지 않는다고 해요. 낮에는 음악 학교에서의 강연이나 워크숍, 인터뷰, 녹음 등 다양한 활동을 소화하고, 저녁엔 블루노트 무대에 오른다고 하죠. 지속적으로 유명 아티스트들이 도쿄를 찾으려면, 좋은 공연장을 넘어 이들이 찾아와야 할 이유들이 있어야 하고요. 그런 면에서 도쿄가 보유한 공연뿐 아니라 음악 산업 전반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잘 갖춰진 생태계는 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사실은, 블루노트가 한때 서울에도 잠깐 문을 열었었다는 점입니다. 2004년 강남 교보타워에 화려하게 오픈했지만, 불과 두 달 만에 문을 닫았다고 해요.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그 이유로 ‘문화적 저변의 부족’을 꼽았습니다. 세계적인 뮤지션의 공연을 지속적으로 열려면, 매 회차 매진을 기록할 만큼 두터운 팬층이 필요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그만한 기반이 부족했던 거죠. 입장료는 당시 기준으로 8만 원 수준으로 매우 고가였기에 더욱 외면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이를 6만 5천 원으로 인하했지만, 그러자 이번에는 적자가 났다고 하고요.

이렇듯 아무리 좋은 문화라도 꽃 피우려면 든든한 문화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블루노트 도쿄의 경영진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한데요. 그들은 재즈라는 장르가 가진 매력을 끊임없이 소개하고, 음악이 가진 가치를 알리는 데에도 꾸준히 힘을 써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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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노트 플레이스는 야외 카페를 마련하는 등 더 대중적인 공간을 지향하는 듯했습니다 ⓒ트렌드라이트

이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 바로 2022년에 오픈한 ‘블루노트 플레이스’입니다. 블루노트 도쿄를 운영하는 곳에서 새롭게 만든 이 공간은, 음악에 집중했던 기존 블루노트와 달리 식사와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되었죠. 좀 더 편안하게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재즈라는 문화를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블루노트 도쿄를 방문한 이유로 2023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를 언급하곤 합니다. 주인공 미야모토 다이가 이끄는 밴드 ‘JASS’가 꿈꾸는 최종 목표가 바로 ‘So Blue’라는 최고의 재즈 공연장 무대였는데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공연장의 모티브는 블루노트 도쿄였습니다. 영화의 감동이 실제 공연장 방문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공간이 문화적 상징이 되어 다시 새로운 창작을 낳는 이 선순환. 정말 멋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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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공간이 문화를 퍼뜨리고, 새로운 영감을 주어 다른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블루 자이언트

공간이 음악을 만나 어떤 문화적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준 블루노트 도쿄. 혹시 도쿄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공연 스케줄을 한 번 확인해 보시고 예약에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더라도, 몰입감이라는 매력을 통해 음악에 빠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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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 창작자. 매주 2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받아보는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 에서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책 <기묘한 이커머스 이야기>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