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과학이다! 궤도의 리얼 궤소리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과학적으로 풀어 드립니다.
📝 세 줄 요약
- 냄새도 과학이다
- 프루스트 현상 : 후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기억과 감정에 직통 신호를 전달하는 음~ 스멜~👃
해가 서서히 넘어가는 늦은 오후, 명절을 앞둔 도시의 한복판은 평소보다 훨씬 분주하다. 창문을 열면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을 타고 노릇하며 반질반질한 기름 냄새가 코끝에 도달한다. 지글지글 전 부치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듯한 냄새 분자 몇 개만으로 순간 시야는 서서히 흐려지고, 수십 년 전 할머니 댁의 아랫목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멀고도 넓게 펼쳐진다. 집안 가득히 고소한 냄새, 뽀얗게 김이 서린 부엌 창문, 노느라 몰려 다니는 아이들, 반가운 손님의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 냄새는 더 이상 향(香, 향기 향)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실존하는 향(鄕, 시골 향)을 머릿속에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갓 구운 빵 냄새에 어린 시절 동네 빵집을 떠올리거나 눅눅한 흙냄새에 시골 외갓집 마당에서 날 보고 꼬리치던 누렁이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특정 냄새가 봉인돼 있던 과거의 시간과 감정을 순식간에 소환해버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과거를 불러오는 걸까? 그저 기분 탓일까? 아니면 우리 뇌 속에 냄새를 통해서만 켤 수 있는 특별한 스위치가 숨겨져 있는 걸까?
문학에 먼저 적힌 냄새의 과학
처음 이 현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람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전 세계 문학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다. 그는 1913년부터 14년에 걸쳐 4천여쪽 분량의 방대한 대하소설을 출간했는데, 한 시대의 역사이자 동시에 한 의식의 역사라는 평가를 받았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어느 추운 겨울날, 따뜻한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한 입 베어 문다. 놀랍게도 그 순간,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적인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 온몸에 퍼져 나가는 감미로운 쾌감을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처음엔 이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혀와 입천장에 닿은 마들렌의 맛과 향에 집중하며 마침내 기억의 근원을 찾아낸다. 적신 마들렌으로부터 어린 시절 경험했던 촉촉한 온기와 감촉뿐만 아니라 잊고 있던 마을 광장과 거리, 산책하던 길까지 통째로 전부 생생하게 떠올리는 장면은 문학적 감수성이 과학적 호기심과 연결되는 놀라운 지점이다.

재미있는 건 거의 90년이 지나서야 이 현상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모넬화학감각센터* 레이첼 헤르츠 박사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어떤 그림과 향기를 함께 보여준 이후 향기만으로 그림을 기억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냄새를 맡았을 때 그림을 봤던 순간 느꼈던 감정을 훨씬 더 생생하게 기억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흥미롭게도 청각이나 촉각 같은 다른 감각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모넬화학감각센터(Monell Chemical Senses Center):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후각·미각에 관한 비영리 연구소
이유는 명쾌하다. 무언가를 보거나 만졌을 때 뇌의 관문이라 불리는 시상을 거쳐 감각 신호를 전달해야 하는 나머지 감각들과 달리, 후각은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핵심 영역인 해마와 편도체에 곧바로 신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오직 냄새만이 기억과 감정에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용회선을 가진 셈이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잠시 저장했다가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하기에 꽤 오래된 기억과 연결된 냄새라도 감지되는 순간, 마치 슬롯머신의 잭팟처럼 보였던 풍경, 들렸던 소리, 느꼈던 감정까지 하나의 덩어리로 방출해버린다. 기쁨, 슬픔, 공포와 같은 원초적 감정의 증폭기 역할을 하는 편도체는 냄새로 자극받으면 단순히 기억만 떠오르는 게 아니라 당시 느꼈던 따뜻함, 설렘, 그리움과 같은 감정까지 고스란히 폭발적으로 되살아난다.
🔎 후각의 과학
냄새를 맡음 ➡️ 기억이 저장된 해마를 자극 ➡️ 기억덩어리 방출 🌋
↘️ 편도체가 원초적 감정 증폭 ➡️ 당시 기억 + 감정 소환
이제 향긋한 명절 음식의 냄새를 맡으면 왜 고향 종합선물 세트 같은 풍경이 떠오르는지 명확해진다. 이건 과학적 발견 이전에 직관적으로 문학 작품을 통해 먼저 내용이 알려진 흥미로운 연구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상의 이름도 과학자가 아닌 문학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름을 따서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른다.
후각이 불러 오는 삶의 한 페이지
냄새와 감정의 강력한 장기 연결은 인류의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발달한 본능적인 능력이다. 오래전부터 탈이 나기 쉬운 상한 음식이나 위협적인 포식자의 냄새를 맡고 미리 위험을 피하거나, 특정 식물의 냄새를 통해 안전한 먹이를 찾아냈던 것처럼 생명체 대부분은 냄새라는 화학적 신호를 통해 생존과 직결되는 위험을 판단해 왔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좋은 냄새는 생존에 유리한 안전한 신호로, 나쁜 냄새는 피해야 할 위험 신호로 뇌에 깊이 각인되어있다.
이처럼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과 직접 연결된 후각은 생존을 위한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비상 열쇠였지만, 현대 사회에서 기업들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프루스트 현상을 써먹기 시작한다. 특정 향기를 이용해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고 그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향기 마케팅이다. 향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우울감을 완화하는 아로마테라피 역시, 냄새가 뇌의 감정 중추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요법이다. 특히, 치매 환자에게 과거에 익숙했던 냄새를 맡게 하여 희미한 기억을 자극하고 인지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정서적인 회복을 유도하는 치료법도 존재한다.
명절 음식 냄새가 고향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닌 후각과 뇌의 특별한 연결 구조 때문에 나타나는 지극히 과학적인 현상이다. 시간이 흐르고 풍경이 변해도 냄새에 담긴 기억과 감정은 우리 뇌리에 깊이 새겨져 언제든 우리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데려다 주는 타임머신이 될 수 있다. 이번 명절에는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잊고 있던 가장 소중한 기억의 문을 가만히 열어줄 향기를 기대하며 지글거리는 전과 구수한 소고기 탕국 냄새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아보자. 후각 세포를 스치는 향기는 이제 단순한 음식 냄새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감정이 농축된 우리 삶의 한 페이지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