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
“아트 페어에 와서 자신이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너무 좋아서 즉석 구매하는 분들이 있어요. 컬렉터들에게는 아트 페어에서만 가질 수 있는 구매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묘한
수년 전부터 매년 9월 초가 되면 코엑스, 아니 서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행사가 있습니다. 바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인데요. 아트페어는 여러 갤러리가 한자리에 모여 미술품을 선보이고 판매하는 일종의 장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리즈는 아트바젤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트페어로 꼽힐 만큼 높은 명성을 가진 행사입니다.
프리즈 서울이 처음 열린 건 2022년입니다. 아시아 최초 개최지로 서울을 택한 프리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인 키아프 서울과 공동 개최되고 있는데요. 올해는 처음 약속했던 5년간의 공동 개최 기간 중 마지막 해였습니다. 물론 양측은 이미 2031년까지 계약을 연장했지만, 그럼에도 올해는 프리즈 서울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었죠.
개인적으로도 2023년부터 4년 연속 프리즈 서울을 찾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올해는 변화가 가장 크게 느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프리즈가 서울에서 어떤 모습을 지향하는지가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습니다.
사실 초창기의 프리즈 서울에서 대중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던 건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가져온 대작들이었습니다.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했고, 수십억 원에서 백억 원이 넘는 작품의 판매 소식도 큰 화제를 모았죠.
하지만 아트페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 프리즈가 가진 또 다른 강점이 한층 더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무엇을 봐야 하는지 한 발 앞서 제안하는 큐레이션입니다. 이미 모두가 좋아하는 작품을 잘 선별해 보여주는 것을 넘어,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고 우리가 앞으로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 작품들을 먼저 제안하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아직 낯선 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주목받을 만한 가치를 먼저 발견해야 하고요. 동시에 관람객이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올해 프리즈 서울은 우리가 잘 모르던 것, 그동안 간과했던 것, 아직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것들의 매력을 꽤 세련된 방식으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가장 잘 드러난 건 세 가지 큐레이션 섹션이었습니다. 작년에도 있었지만 올해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로 확장된 포커스(Focus), 다른 프리즈에서는 운영되어 왔지만 국내에는 처음 도입된 스포트라이트(Spotlight), 그리고 올해 새롭게 선보인 머티리얼 프랙티스(Material Practice)가 그 주인공들이었는데요.
오늘은 이 세 섹션을 중심으로, 아직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게 하고 그 취향의 확장까지 이끄는 프리즈 서울만의 큐레이션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포커스(Focus) —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포커스는 ‘포커스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프리즈가 서울에 자리 잡기 시작한 첫 순간부터 존재했던 큐레이션 섹션입니다. 설립된 지 12년 이하의 갤러리만 참여할 수 있는데요. 흥미로운 건 이 섹션에 참여하는 모든 부스가 단 한 명의 작가를 집중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신진 갤러리를 조망하는 동시에, 이들이 선별한 작가들까지 대중 앞에 설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가 있는 거죠.
더욱이 올해는 ‘아시아’라는 지역을 넘어 글로벌로 영역을 넓혔습니다.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우리가 앞으로 좋아하게 될 만한 매력적인 작가와 갤러리를 소개하겠다는 뜻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포커스 섹션에서는 매년 다양하면서도 실험적인 작품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띕니다. 올해 포커스 스탠드상을 수상한 파이프갤러리와 차승언 작가도 그러했습니다. 공예적인 소재인 직조와 직물을 활용해 추상 회화를 표현한 작품들이었는데, 정말 새롭고 신선하더라고요.
직조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차승언 작가의 작품들은 매우 매력적이었습니다 ⓒ기묘한
또한 갤러리 부스 하나가 작가 한 명에게 온전히 집중하다 보니, 전시 방식도 파격적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은 마트(MAĀT) 갤러리와 조프루아 피숑 작가의 작품들이 그러했는데요. ‘사계’라는 주제로 부스를 마치 하나의 무대처럼 꾸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온전히 붙잡고 있었죠.
단 한 명의 작가에게 집중하기에 이렇게 파격적인 부스 디자인이 가능해 보였습니다 ⓒ기묘한
이러한 포커스는 갤러리뿐 아니라 컬렉팅의 참여 문턱을 낮추는 역할도 합니다. 휘슬 갤러리는 dpgp78의 스펀지 블록 작품을 70달러부터 선보였는데요. 준비한 500점 가운데 무려 400점 이상을 판매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고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컬렉팅을 경험해볼 수 있었던 겁니다.
미술 작품 구매를 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스펀지 블록은 입문하기 딱 좋은 오브제였습니다 ⓒ기묘한
이처럼 프리즈 서울의 포커스 섹션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갤러리를 소개하고, 그 매력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컬렉터의 외연까지 넓히고 있었고요. 올해 이름에서 ‘아시아’를 떼고 지역적 한계를 벗어난 만큼, 앞으로는 이러한 역할이 더 넓게 확장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포트라이트(Spotlight) — 놓쳤던 작가를 다시 보게 합니다
처음부터 프리즈 서울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포커스와 달리, 원래 프리즈에는 있었지만 올해 서울에 처음 도입된 섹션도 있습니다. 바로 스포트라이트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스포트라이트와 포커스의 차이가 조금 헷갈렸습니다. 둘 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나 작가를 소개하는 섹션인가 싶었거든요.
하지만 막상 스포트라이트 부스를 둘러보니, 이곳에서 조명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이미 미술계 안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이들이었습니다. 포커스가 아직 덜 알려진 작가와 갤러리를 소개하는 자리라면, 스포트라이트는 원래도 중요한 작가였지만 더 넓게 알려질 필요가 있는 이들에게 집중합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미 재평가가 시작된 흐름을 대중과 컬렉터에게까지 연결하는 섹션에 더 가까웠죠.
이처럼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한 작가들을 다시 비추는 자리이기에, 이 섹션의 부스들 역시 작가 한 명에 집중하는 형태였습니다. 다만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구성이 많이 보였던 포커스에 비하면, 스포트라이트는 조금 더 진중하게 작가와 작품을 전하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차이는 관람객이 작가를 바라보는 태도까지 다르게 만들었고요.
이번 스포트라이트 섹션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는 손상기 작가였습니다. 손상기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글로벌 기준으로는 아직 덜 알려진 편입니다. 앞선 세대인 유영국, 김환기, 박서보 작가 등이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에 비해, 손상기 작가의 세대는 아직 그만큼의 조명을 받지 못한 셈이죠. 한국 컬렉터를 넘어 세계의 컬렉터들이 주목할 만한 작가를 콕 집어 미리 소개한 겁니다.
손상기 작가의 작품들이 재평가받는다면 한국 미술사의 폭도 더 넓어질 수 있을 겁니다 ⓒ기묘한
한영수 작가도 비슷한 사례였습니다. 한국 현대 사진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지만, 정작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거든요. 서구 중심으로 해석되던 사진 미술사에 새로운 시선을 더해줄 수 있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직후 엄혹하다고만 알던 시대에도 일상이 있고, 예술이 있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기묘한
한영수 작가의 부스는 관람객 입장에서도 반가웠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전쟁 직후 서울의 모습을 여러 작품을 통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관적으로 보는 재미까지 더해주는 구성이었죠.
물론 스포트라이트가 한국의 덜 알려진 작가만 소개하는 섹션은 아니었습니다. 칼 오토 괴츠는 독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게르하르트 리히터, 지그마어 폴케,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 프란츠 에르하르트 발터 등 제자들이 오히려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그 이름이 흐려진 인물이기도 하죠. 이를 다시 발굴해 국내 관람객에게 소개하며 취향의 외연을 넓힌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유명 작가들의 스승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새로운 매력에 눈뜨도록 유도하고 있었고요.
사실 프리즈 서울에 도입되기 전부터 스포트라이트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작가들을 먼저 비추고, 더 넓은 무대로 연결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2012년부터 ‘비서구·여성 작가’를 적극적으로 소개해 왔고, 이는 지금의 미술계에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스포트라이트는 단지 좋은 작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앞으로 더 주목받아야 할 가치를 먼저 비추고, 페어가 직접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역할까지 하고 있었던 거죠.
머티리얼 프랙티스(Material Practice) —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올해는 아예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흐름을 직접 제안하는 섹션까지 등장했습니다. 바로 회화를 넘어 공예와 물성에 기반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머티리얼 프랙티스인데요. 이 섹션을 서울에서 처음 선보였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리즈가 단순히 현재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넘어, 앞으로의 흐름을 한 발 앞서 제안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었죠.
실제로 올해 프리즈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니, 회화 중심이던 아트페어의 풍경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회화 안에서도 재료와 표현 방식이 훨씬 다양해지고 있었고요. 아예 공예 기반의 작품을 전면에 내세운 갤러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재료와 물성 자체에 집중한 부스들을 하나의 섹션으로 묶은 건 지금의 흐름을 꽤 정확하게 짚어낸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공예 작품이 중심이다 보니 작품을 전달하는 방식도 조금 달랐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돌의 고유한 물성을 탐구하는 조각 작품을 선보인 갤러리 스페이스 톤이었습니다. 한진섭 작가의 돌 작품들을 단순히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만져보며 질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작품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섹션인 만큼, 이렇게 재료를 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 특히 잘 어울렸습니다.
직접 작품을 만지고 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기묘한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부스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한옥을 연상시키는 공간 안에 작품을 배치하고, 한편에는 책가도를 떠올리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 작품을 보여주고 있었는데요. 공예 작품을 단순히 진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떤 공간과 맥락 속에서 더 살아날 수 있는지까지 함께 보여주려는 시도가 느껴졌습니다. 큐레이션 섹션답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뿐 아니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까지 깊이 고민한 흔적이 보였죠.
하나의 주제로 갤러리들을 모은 큐레이션에 더해 각 갤러리들의 개성도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였습니다 ⓒ기묘한
이처럼 전통적인 재료와 형식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은, 머티리얼 프랙티스가 왜 서울에서 처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랜 공예 전통을 가진 한국은 재료와 손의 감각을 새롭게 조명하기에 좋은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 섹션이 프리즈 서울만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는다면, 단순히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흐름을 키워가는 역할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아할 만한 제안을 세련되게 전해야 합니다
이처럼 초창기 프리즈 서울은 동시대의 가장 유명한 작가와 대작들을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프리즈 서울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잘 모르던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이들의 가치를 다시 비추며, 아예 새로운 흐름까지 한 발 앞서 제안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죠.
결국 좋은 큐레이션은 이미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골라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것을 먼저 발견해 보여주고, 왜 주목할 만한지 자연스럽게 설득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 프리즈 서울은 큐레이션이 어떻게 취향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는 일이 결코 강요나 수업처럼 느껴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프리즈는 성격이 다른 여러 큐레이션 섹션을 각기 다르게 마련했고요. 각 섹션 안에서도 관람객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했습니다. 낯선 것을 소개하되, 받아들이는 방식까지 강요하지 않은 셈이죠.
사실 올해 행사가 열리기 전에는 프리즈 서울을 둘러싼 부정적인 기사도 유독 많았습니다. 메가 갤러리이자 프리즈 서울 원년 멤버이기도 한 페로탕, 마시모 데 카를로 등이 이탈했고요. 이들 중 일부는 경쟁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에만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매년 들려오던 수십억, 수백억 원대의 대작 판매 소식마저 잠잠해지면서, 구매력이 부족한 서울 시장에서 글로벌 갤러리들이 떠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나왔죠.
하지만 현장에서 느껴진 프리즈의 방향은 조금 달랐습니다. 화제성 높은 대작에만 의존하기보다,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게 하고 컬렉팅의 저변을 넓히는 데 더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올해 프리즈 서울의 성패를 최고가 작품 판매 여부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더욱이 내년 프리즈 서울은 코엑스를 떠나 더 작은 규모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큐레이션을 강화하는 흐름이 공간 축소라는 조건과 만나 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 기대가 됩니다. 혹시 올해 행사를 놓치셨다면, 내년에는 프리즈 서울에 들러보셔도 좋겠습니다. 아직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작품을 발견하고, 그 덕분에 취향의 범위가 한 뼘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기묘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 창작자. 매주 2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받아보는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 에서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책 <기묘한 이커머스 이야기>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