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가 기반이 될 때 큐레이션도 꽃피는 법입니다, 사러가 슈퍼마켓 | 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

2026.10.20

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

“손님이 자주 찾는 물건만 갖다 놓으면, 우린 진작에 없어졌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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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사러가 슈퍼마켓을 안 건 꽤 오래전입니다. 십여 년 전 우연히 연희동을 지나가다 특이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도 늘 기억에 남아 있었거든요. 막상 들어가 보지는 못했던 이곳을 다시 주목하게 된 건 ‘연희동의 냉장고’라 불릴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자, 무려 60년이 넘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슈퍼마켓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대기업 계열의 대형마트와 슈퍼마켓들도 사라져 가는 이 시대. 동네 슈퍼마켓이 이토록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로 이들의 특별한 큐레이션이 꼽히곤 합니다. 사러가 슈퍼마켓 관계자들도 자신들을 ‘발견을 파는 슈퍼’라고 칭할 정도인데요. 직접 가본 이곳은 남다른 상품 구색의 매력도 상당했지만, 그보다 이러한 큐레이션을 뒷받침하는 신뢰의 힘이 돋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러가 슈퍼마켓이 자신들의 큐레이션을 설득하기 위해 신뢰를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이야기 나눠 보려 합니다.

동네 슈퍼에서 두리안을 판다고요?

“우와, 저기 두리안이 있네.”

사러가 슈퍼마켓 입구의 과일 코너를 구경하던 중 한 손님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곳에는 대기업 대형마트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두리안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사러가 슈퍼마켓의 상품 구성이 얼마나 특색 있는지를 단번에 느끼게 해 주던 순간이었죠.

사러가 슈퍼마켓은 분명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다운 한 끼를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남상우 창업주의 사업 신조처럼 이곳은 누구나 자신다운 먹거리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제안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외국인 주민이 많았던 연희동이라는 지역 특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죠.

원래도 수입 상품이 많았지만, 이러한 큐레이션에 더욱 집중하게 된 건 2000년대 초반이라고 합니다. 대형마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일부러 찾아와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 사러가 슈퍼마켓은 과일 코너엔 두리안이, 정육 코너엔 양갈비와 돼지 특수부위가, 채소 코너엔 엔다이브와 식용꽃이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마트였습니다. 다만 문제는 이것만으로 생존을 보장받던 시대가 지났다는 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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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과일부터 수입 과일까지, 사러가의 선택에는 저마다 기준이 있습니다. ⓒ기묘한

십여 년 전, 지금은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으로 이름이 바뀐 SSG푸드마켓 청담에 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탄성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치 해외 시장에 온 듯한 기분을 만들어주었던 형형색색의 수입 과일과 채소들, 해외에서나 맛볼 수 있던 수입 과자와 식품들까지 정말 별천지였거든요.

하지만 얼마 전 SSG푸드마켓 도곡점을 찾았을 땐 제 기준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상품 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사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식품의 범위가 매우 넓어졌기 때문이었죠. 대표적으로 컬리만 해도 과거 프리미엄 슈퍼마켓에서나 살 수 있었던 상품들을 이제는 언제든 집에서 편하게 주문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큐레이션만으로 고객이 찾아오는 매장을 만들기는 어려워진 겁니다. 그렇다고 사러가 슈퍼마켓처럼 작은 곳에서 차별화된 상품 구색을 무한정 늘리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요. 그럼에도 이곳이 꾸준히 사랑받는 건 상품의 다양성을 넘어 또 다른 특별함을 제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전이라는 기본에 끝없이 집착합니다

사실 독특한 식재료와 상품들만큼이나 사러가 슈퍼마켓을 둘러보는 내내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유기농’, ‘안전한 먹거리’, ‘No MSG’ 같은 문구들이었죠. 하나같이 안전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장보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일까요? 신선도, 가격, 쉽게 만나기 어려운 특별한 상품들. 이런 요소들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중 하나만 꼽으라면 결국 안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먹는 것인 만큼 우리는 더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리 맛있고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음식을 만드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라 할지라도, 만약 비위생적인 곳이라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겁니다. 특히 우리의 먹거리를 다루는 곳이라면, 기본적인 안전이 뒷받침되어야 큐레이션도 빛날 수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사러가 슈퍼마켓의 상품들은 정말 특별합니다. 소고기를 예로 들어볼게요. 이곳에선 동물복지와 친환경 축산을 지향하는 설성목장과 같은 검증된 곳들의 상품을 취급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비싼 최고급 한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수입산 선택지도 제공하는데요. 이조차도 호주 농장과 직접 계약을 맺어 100% 풀을 먹인 유기농 소고기를 수입해 온다고 합니다. 매장이 하나뿐인 슈퍼마켓이 택하기에는 상당히 번거로운 방식인데요. 안전이라는 가치에 사러가 슈퍼마켓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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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목초 사육 소고기부터 조미료 없는 반찬까지, 안전한 먹거리에 진심입니다. ⓒ기묘한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사러가 슈퍼마켓은 델리 코너는 물론 반찬 코너의 상품들도 직접 만듭니다. 예를 들어 반찬의 경우 조미료를 쓰지 않고 수제 간장을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이 정도면 단순한 가게를 넘어, 정말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연희동의 냉장고’라 불릴 만했습니다. 다양한 식재료가 있다는 걸 넘어 우리 집 냉장고처럼 믿을 수 있다는 뜻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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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함·유기농·No MSG를 강조한 안내에서 먹거리를 고르는 기준이 드러납니다. ⓒ기묘한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매장을 조금만 둘러봐도 사러가 슈퍼마켓이 얼마나 신경 써서 상품을 고르고 있는지 전달하려 애쓴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거든요. 좋은 상품을 준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치를 고객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까지. 신뢰가 쌓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친절함을 더합니다

물론 안전은 기본이기에 다른 곳들도 많이 강조하는 부분이긴 합니다. 사러가 슈퍼마켓만큼 집요하게 매달리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래서 이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믿을 만하면서도 특별한 상품에 고객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디테일을 더하고 있었죠.

최근 각광받는 서비스 중 하나가 과일 커팅입니다. 한여름 수박 커팅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오픈런을 하고, 몇 시간씩 대기까지 한다는 기사가 한때 나올 정도였죠.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는 아직 백화점 식품관과 같은 일부 매장에서나 주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사러가 슈퍼마켓은 정말 다양한 방면에서 이와 유사한 편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생선을 사면 대신 구워주시고요. 대게나 크랩은 쪄주십니다. 양념육을 사면 거기에 어울리는 부재료를 추가 비용 없이 제공해 주신다고도 했죠. 예약은 필요하지만 고기를 미리 드라이에이징해 주기도 한다고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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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은 구워주고 대게는 쪄주며 고객의 수고를 덜어줍니다. ⓒ기묘한

이런 친절함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방문했을 때 국거리 고기 가격이 좋아 두 덩이를 샀는데, 양이 많다고 하니 다섯 개로 손질해 소분까지 해주셨습니다. 말로는 손님이 없어서 해드리는 거라고 했지만, 다른 분들도 비슷한 요청을 자연스럽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선 이러한 서비스가 꽤 일상적인 일이라고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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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의 요청에 맞춰 손질과 소분을 돕는 정육 코너에서 동네 슈퍼의 친절함을 느낍니다. ⓒ기묘한

이런 작은 친절함이야말로 대기업들이 따라 하기 더 어렵습니다. 서비스가 표준화되어야 하는 대기업 매장에서는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요청들을 일일이 매뉴얼에 담고 대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스타벅스의 편리함을 좋아하다가도 동네 카페의 따스함이 그리울 때가 있는 것처럼, 사러가 슈퍼마켓은 좋은 상품을 골라주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고객이 일상에서 편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마지막 수고까지 대신해 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역사회는 물론 생산자와도 신뢰를 쌓아갑니다

안전에 대한 집착과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세심한 친절함에 더해, 마지막으로 사러가 슈퍼마켓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지역사회 및 생산자들과 쌓아온 관계였습니다. 사실 사러가 슈퍼마켓은 ‘사러가 쇼핑센터’라고도 불리며, 건물 안에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해 있는데요. 여러 소상공인 점포들과 함께하며 연희동만의 색깔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입점해 있는 빵집 피터팬은 연희동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커피 코너에 들어와 있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커피리브레 역시 연희동 바로 옆 연남동의 터줏대감이라는 점에서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예 이웃인 같이양조장과 협업해 만든 막걸리도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함을 더하고 있었고요.

사러가 슈퍼마켓은 상품을 공급하는 생산자들과도 오랫동안 깊은 신뢰 관계를 맺어왔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호주 목장과도 무려 10년째 거래 중이라고 하고요. 이렇게 오랜 시간 쌓아온 관계 덕분에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품들도 많이 들여올 수 있었다고 하죠. 단순히 좋은 생산자를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좋은 품질을 오래 지켜나갈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데 더욱 집중해 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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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양조장과 공동 기획 상품을 선보이며 지역사회·생산자와 신뢰를 쌓습니다. ⓒ기묘한

돌이켜 보면 사러가 슈퍼마켓의 특별한 큐레이션은 이러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꾸준히 선보이며 사러가의 선택에 대한 믿음을 쌓았고요. 여기에 고객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친절함을 더해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 및 생산자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가며 이러한 가치를 지켜온 거죠.

결국 사러가 슈퍼마켓은 단순히 남다른 상품을 골라주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이 추천한다면 믿고 선택해도 좋겠다는 확신을 오랜 시간 쌓아온 곳이었죠. 그렇기에 낯선 식재료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맡길 수 있는 편안함도 가능했던 겁니다. 60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비결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혹시 연희동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으시다면 꼭 한번 들러, 오랜 시간 쌓인 신뢰가 어떻게 특별한 큐레이션으로 이어지는지 직접 경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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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 창작자. 매주 2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받아보는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 에서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책 <기묘한 이커머스 이야기>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