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
“낭만은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디에디트* 영화제에서 가장 파격적인 프로그램이었던 ‘블라인드 상영회’를 기획한 에디터 B가 상영 직후 남긴 말입니다. 그는 요즘 콘텐츠 소비가 ‘원할 때 골라 보고, 지루해지면 바로 멈추는’ 효율의 논리에 맞춰지면서, 정작 낭만이 사라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죠.
*디에디트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지향하는 미디어로, 에디터 M·H·B를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낯설고,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는 이 기획에 관객은 전석 매진으로 화답했습니다. 제목도 줄거리도 모른 채 두 시간을 통째로 맡기는 블라인드 상영회가 정말로 ‘낭만’으로 받아들여진 듯했습니다. 관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작품에 몸을 온전히 맡기며, 선택과 중단의 자유를 잠시 내려놓았고요.
이번 영화제의 프로그래머 김철홍 평론가는 이에 대해 “얼마나 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두텁길래 ‘에디터 B’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시간과 돈을 기꺼이 맡기느냐”라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제목도 정보도 없이 관객을 움직이게 만든 디에디트 영화제가, 그 신뢰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그 비결을 짚어보려 합니다.
기준이 있을 때 낯선 경험도 설득됩니다
이번 디에디트 영화제는 ‘영화제답지 않은 영화제’를 표방했습니다. 정확히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제는 처음인 사람”을 위한 행사였죠. 어렵고 해설이 필요한 작품 대신 직관적으로 재미있는 작품을 골랐다고 하고요. 아예 유튜브 공개 연애 예능인 <72시간 소개팅>까지 상영했습니다.(참고로 가장 먼저 매진된 회차가 바로 이 <72시간 소개팅>이었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부담 없이 결제할 수 있었습니다. 전 회차가 5분 만에 매진됐다고 하는데요. 만약 이런 취지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면, 티켓팅 열기는 덜했을 겁니다. 영화제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저 같은 사람도 주저 없이 예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제는 처음이라도, 디에디트 영화제는 재미있겠다”라는 신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블라인드 상영회는 허들이 더 높았던 프로그램이었기에 기준은 더 촘촘했습니다. 디에디트의 대표인 에디터 M은 이번 상영회를 기획한 에디터 B에게 다음 조건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 오프닝부터 몰입감이 있을 것
- 상영 시간은 2시간 이내일 것
- 열린 결말이 아닐 것
제게는 곧 “지루하지 않고, 길지 않으며, 결말이 분명한 영화”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흔히 말하는 예술영화보다 상업영화에 가까운 결을 요구한 셈이죠. 덕분에 걱정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에 갈 수 있었습니다.

불완전함을 드러낼수록 신뢰는 쌓입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번 상영작의 정체를 고른 에디터 B를 제외하면 다른 에디터들조차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까지 무엇을 트는지 몰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영 후 이어진 GV(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두고 꽤 오랫동안 이야기가 이어졌죠.
사실 큐레이션은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 없습니다. 특히 취향의 차가 명확히 갈리는 콘텐츠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준을 아무리 세세하게 마련해도 그것만으로 완전히 객관적일 순 없습니다. 앞서 제시된 세 가지 조건만 봐도, 상영 시간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지만 ‘몰입감’이나 ‘열린 결말 여부’는 해석의 여지가 충분하니까요.
그래서였을까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적절한 선택이었는지를 두고도 꽤나 활발한 논쟁이 오갔습니다. 이때 에디터 M과 H는 선정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관객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관객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이 더 공감 가고 유쾌하게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과정 자체를 솔직히 드러내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추천에 대한 신뢰를 더했습니다. 그 대화는 하나의 서사가 되어 관람 경험을 확장시키는 재미 포인트가 되기도 했고요. 만약 주최 측이 인위적으로 선택을 옹호했다면 일부의 아쉬움은 곧바로 불쾌감으로 번졌을지 모릅니다. 반대로 감상을 있는 그대로 나누고, 주최 측조차 관객과 같은 선상에서 숨김없이 대화하자, 아쉬웠던 지점들마저 ‘함께 만들어 가는 서사’로 남을 수 있었던 거죠.
때론 권위보다 공감이 큰 힘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무엇을 ‘주입’하기보다는 열린 태도로 공감하고 끝까지 듣는 자세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좋은 큐레이션에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부분 맞는 말입니다. 특히 평가 기준이 모호한 콘텐츠 영역에선 권위가 없으면 추천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울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권위가 지나치면 반발을 부르기 쉽습니다. 대개 억누르거나 강요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내 취향과 다르면 설득은커녕 거부감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권위에 기대 선 추천은 그 근거가 흔들리는 순간 신뢰도 함께 무너집니다.
반대로 공감에 기반한 접근은 설득의 강도는 낮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의 답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더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블라인드 상영회가 그랬습니다.
영화제는 흔히 ‘시네필의 축제’로 불리지만, 정작 시네필의 경계는 모호하고 스스로 그렇게 부르길 주저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에디터 B 역시 왓챠에만 2천 개가 넘는 평점을 남겼을 만큼 영화를 많이 보지만, 스스로를 시네필이라 규정하진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끝까지 ‘일반 관객’의 눈으로 영화를 고르고 평가했고, 그만큼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했습니다. 이번에 상영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사실은 모두에게 완벽한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점도 솔직히 고백했죠.
이 낮아짐이 오히려 힘이 되었습니다. 관객은 거부감 없이 작품을 바라볼 수 있었고, 추천은 더 넓은 공감과 지지를 얻었습니다. 권위로 누르기보다 공감으로 끌어안는 태도가 이번 디에디트 영화제가 만든 신뢰의 핵심이었던 겁니다.
연결하며 더욱 강화해 나갑니다
그렇다면 왜 디에디트는 영화제를 만들고, 이런 방식의 콘텐츠 추천을 실험했을까요? 그간 가전제품 또는 IT기기를 주로 다뤄온 매체가 돌연 영화제를 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매거진의 콘텐츠는 취향으로 도시와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야 한다.”
에디터 B가 밝힌 디에디트의 본질은 ‘연결’이었습니다. 취향은 연결될 때 더 빛난다는 전제 아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영화제를 통해 관객들을 이어 붙이고 싶었다는 거죠. 영화제는 오프라인에서 구현된 하나의 ‘매거진 콘텐츠’였던 셈입니다.

저는 여기서 신뢰받는 큐레이션의 마지막 퍼즐을 보았습니다. 취향은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연결이 촘촘해질수록 더 강한 힘을 갖습니다. 큐레이션도 같습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영화제가 아닌 한 편의 평론으로만 끝났다면 설득력은 제한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GV로 관객과 직접 소통하며 쌓인 서사는 취향의 장벽을 낮추고, 원래 대상이 아니었던 이들까지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낯선 형식의 영화제를 설득하고, 영화제를 처음 경험하는 관객까지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 ‘연결’에 있습니다. 디에디트가 그간 구독자와 꾸준히 맺어 온 신뢰의 연결이 바탕이 되었기에, 이번 영화제에 공감한 이들이 많았던 거죠.
결국 좋은 큐레이션은 상호 작용입니다
오늘은 미디어 기업 디에디트가 연 작은 영화제가 어떻게 전 회차 5분 매진을 기록했는지, 특히 ‘블라인드 상영회’라는 파격적 형식이 통할 수 있었던 신뢰의 원인을 돌아봤습니다.
큐레이션에는 언제나 추천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한 번의 멋진 선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오해하지만, 신뢰는 단숨에 쌓이지 않습니다. 좋은 큐레이션은 명확한 기준, 숨김없는 솔직함, 그리고 관객과의 ‘연결’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교감과 상호작용 속에서 자랍니다. 이렇게 축적된 신뢰가 있어야만, 낯선 선택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 강한 큐레이션의 힘은 한 번의 추천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대화에서 나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