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 미세한 사각거림마저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스물트론스텔레

2026.04.28

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

"종이에 직접 쓰는 건 달라요. 꾹꾹 눌러쓰는 과정에서 생각이 더 깊어지고, 그 시간이 몸으로 전달되면서 기억도 오래 남아요"

12 smultronstalle
ⓒ기묘한

서촌 골목길 깊숙이 들어가면, 한쪽에 벽돌 건물이 보입니다. 간판도 없는 1층, 매끈한 금속문.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운 이 공간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듭니다. 애초부터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아지트를 꿈꾸며 만들었다는 이곳의 이름은 ‘스물트론스텔레’입니다. 스웨덴어로 ‘야생 딸기밭’을 뜻하는 이 단어는, 나만이 알고 싶은 아주 소중한 장소, 가면 행복해지는 개인적인 아지트를 의미한다고 하죠.

스물트론스텔레는 종이에 대한 경험과 기록의 도구를 제안하는 브랜드 ‘썸무드디자인’의 쇼룸입니다. 첫 오프라인 공간임에도 브랜드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을 먼저 드러낸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이곳은 단순히 상품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종이를 직접 고르고 경험하는 ‘종이 바(Paper Bar)’라는 방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름도 낯설고, 찾기도 쉽지 않은 이 공간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물트론스텔레는 단지 종이를 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깨우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깨웁니다

스물트론스텔레는 약 10평 남짓의 작은 매장입니다. 그중 절반을 종이 바와 시필 존이 차지하고 있죠. 평소 손글씨나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종이'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겁니다. 여느 문구 매장을 가도 펜이나 연필은 다양하게 테스트해 볼 수 있지만, 종이의 질감을 세세히 비교해 가며 쓸 수 있는 곳은 드무니까요.

12 smultronstalle
오로지 종이 만으로 가득 찬 진열대에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만져 보는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기묘한

여러 종이가 한데 모인 바를 구경하다 보면, 우리가 지금껏 놓치고 있던 미세한 감각들이 참 많았구나를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손끝으로 만져만 봐도 어떤 건 거칠고, 어떤 건 매끄러우며 광택감도 제각기 다르죠. 게다가 종이마다 상세하게 쓰인 큐레이션 문구들은 둘러보는 재미를 한층 더해줍니다. 종이를 만든 제지 회사의 역사와 이야기부터,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 그리고 특정 필기구와의 궁합까지 정말 상세하게 적혀 있거든요.

12 smultronstalle
종이마다 쓰인 큐레이션 문구들만 봐도 종이 각각의 특성과 매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기묘한

이러한 세심한 경험 기획은 썸무드디자인 김설 대표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다이어리 제품을 기획하며 수없이 많은 종이를 테스트했던 그 치열한 경험을 방문객 모두와 나누고 싶었던 거죠.

저도 비슷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출간을 준비할 때, 아마 그때가 거의 유일하게 종이를 두고 고민했던 순간이었거든요. 책은 많이 읽었지만 종이의 촉감에 집중해 본 적은 없었는데, 내 책이 되니 광택과 질감을 계속 비교하며 꽤 신중하게 고르게 되더라고요. 사소해서 평소엔 지나치지만, 분명 매 순간 몸이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는 일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구나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용을 통해 의미가 축적되는 걸 압축해 전합니다

혼자 이것저것 만져 보며 그 미세한 차이를 느껴 보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스물트론스텔레를 방문하신다면 꼭 '시필'을 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종이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결국 무언가를 쓰며 사용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니까요.

12 smultronstalle 04 edit
시필을 하러 한번 앉으면 끊임없이 주어지는 다양한 필기구 덕분에 시간 가는지 모르게 되더라고요 ⓒ기묘한

궁금한 종이를 골라, 자리에 앉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필이 시작됩니다.

“선호하는 필기구가 있으신가요?”

평소 즐겨 쓰는 필기구부터 종이를 사용하는 목적까지, 세심한 질문을 통해 내게 꼭 맞는 종이와 필기구가 눈앞에 놓입니다. 매장에서 판매 중인 제품 외에도 오직 시필만을 위해 준비된 다양한 도구들이 가득했죠. 이렇게 여러 종이와 펜을 번갈아 가며 쓰다 보면, 무뎌졌던 우리의 감각도 다시금 깨어납니다.

저도 이 과정이 너무 즐거워서 방문할 때마다 1시간 이상 머무르며 이것저것 써보곤 했는데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구에 빠지는 건 사실 ‘좋은 물건’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스물트론스텔레는 그 시간을 꽤 짧은 동선 안에서, 강렬한 경험으로 압축해 남겨주는구나 하고요. 그리고 이를 마치고 나올 때쯤, 어느덧 제 손에도 마음에 든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습니다.

번거로움이 특별함을 만드는 법입니다

마음에 드는 종이를 발견하면, 그 종이를 구매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종이를 노트나 다이어리 같은 ‘완성품’ 형태로 접하곤 하죠. 스물트론스텔레에도 시필해 본 종이로 만든 제품들이 여럿 있어 그대로 구매할 수도 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건 원하는 종이를 골라 ‘나만의 노트’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12 smultronstalle
앞서 고른 종이는 원하는 종류와 장수대로 구매하고, 원한다면 노트로 바인딩할 수도 있었습니다 ⓒ기묘한

종이 이름과 매수를 적어 종이만 구매할 수도 있고, 아예 묶어서 노트 형태로 바인딩해주기도 합니다. 한 장 단위로도 구매가 가능해, 여러 종이를 섞어 ‘믹스 버전’으로 가져갈 수도 있고요. 물론 시필 과정에서 용도와 취향에 맞는 종이를 추천해주기도 했습니다.

12 smultronstalle
누구나 편하게 시필하고 종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 매장의 분위기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기묘한

사실 이는 매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꽤 번거로운 일일 겁니다. 종이는 보통 묶음으로 들어오니 다시 낱장으로 나누고 포장해야 하고, 재고 관리도 까다로워지죠. 게다가 시필 테스트나 노트 바인딩에 별도 비용을 받는 구조도 아니고요. 효율만 따지면 쉽게 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이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건, 다양한 종이를 경험하고 쓰는 즐거움을 정말로 ‘나누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기록이 아닌 감각을 이야기해서 좋았습니다

썸무드라는 브랜드를 소개할 때, ‘기록을 선물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기록은 어떨 때 진정한 선물이 될까요? 그들은 종이 위에 쌓인 시간과 흔적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필로 쓴 주문서, 브랜드 향을 뿌린 택배 박스, 정성껏 접은 포장지를 고수하며 아날로그가 주는 가치를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다고 하죠.

스물트론스텔레 역시 이러한 브랜드의 철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요즘은 디지털로도 얼마든지 기록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종이에 펜을 꾹꾹 눌러 담아 쓰도록 이끄는 건, 그 시간 동안 손끝으로 전해지는 아날로그적인 감각과 마음의 여유 때문이 아닐까요?

12 smultronstalle
쇼룸답지 않게 브랜드의 노출은 제한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는 잘 전달되었습니다 ⓒ기묘한

같은 글이라도 어떤 종이에, 어떤 펜으로 기록하느냐에 따라 완성된 모습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들이는 시간과 느낌도 제각기 다르게 기억에 남기 마련이죠.

평소 놓치고 있던 작고 미세한 사각거림의 순간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공간, 스물트론스텔레. 서촌 골목 깊숙한 이 작은 아지트에서 잊고 지냈던 감각의 즐거움을 되찾고 싶으시다면,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작성자 이미지

기묘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 창작자. 매주 2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받아보는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 에서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책 <기묘한 이커머스 이야기>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