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 하나에 집중할수록 경험은 더 깊어집니다, 퐁피두센터 한화

2026.07.07

기묘한 큐레이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좋은 큐레이션을 전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나에게 좋은 것을 알아본다'는 믿음으로, 브랜드, 콘텐츠, 공간 등 매달 하나의 큐레이션 사례를 소개합니다.

“퐁피두센터의 진정한 가치는 특정 작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폭넓은 시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4 centrepompidou hanwha
ⓒ기묘한

파리에 가면 꼭 들르게 되는 미술관 세 곳이 있습니다. 루브르, 오르세, 그리고 퐁피두센터. 그중 현대미술을 주로 다루는 퐁피두센터는 아쉽게도 지금은 방문할 수 없습니다. 리노베이션으로 인해 2030년까지 휴관에 들어갔기 때문인데요.

그렇다고 아쉬워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퐁피두센터는 2015년 스페인 말라가를 시작으로 전 세계 곳곳에 해외 거점들을 세우고 있고, 이곳들을 통해 퐁피두센터의 소장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26년 6월 초, 그중 하나가 서울에도 문을 열었습니다. 63빌딩에 자리 잡은 퐁피두센터 한화입니다.

퐁피두센터 한화는 큐레이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장소입니다. 본래 미술관은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따로 있을 정도로, 좋은 작품을 고르고 맥락에 맞게 보여주는 일이 핵심인 공간입니다. 수장고에 쌓인 수많은 작품을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고, 어떤 동선 안에서 경험하게 할 것인지가 곧 미술관의 역량이 되니까요.

퐁피두센터 한화에는 여기에 분관이라는 조건까지 더해집니다. 파리와는 다른 규모와 환경 속에서, 퐁피두센터다운 경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지는 거죠. 운 좋게도 저는 리노베이션이 시작되기 전 파리 퐁피두센터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좋은 기억을 품고, 퐁피두센터 한화가 문을 열자마자 전시를 보고 왔는데요. 작은 규모라는 제약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꾸며, 개관 첫 전시답게 흥미로운 큐레이션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더 많은 작품을 보여주기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더 깊게 경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죠.

큐비즘, 하나에 집중하니 더 선명해졌습니다

퐁피두센터 한화가 준비한 첫 전시의 이름은 《큐비스트 : 시각의 혁신가들》입니다. 이름처럼 큐비즘, 우리말로는 입체주의라 불리는 미술 사조 하나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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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이란 주제를 택한 건 상당히 과감한 선택이었고,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 개관전이 되었습니다 ⓒ기묘한

현대미술은 그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해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큐비즘이 특히 어렵게 느껴지곤 했는데요. 우리가 보통 그림이라고 하면,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그린 것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에 익숙한 거죠.

그런데 큐비즘은 애초에 그런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정면에서 본 모습만이 아니라 옆에서 본 모습,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나아가 시간이 흐르며 달라지는 인상까지 한 화면 안에 담으려 했거든요. 한쪽에서 바라본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하나의 그림 안에 담다 보니,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오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 작품 하나하나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요. 피카소의 그림들을 떠올리면 조금 더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유명세와 달리 정작 큐비즘이 하나의 미술 사조로 기능하던 시기는 1907년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27년까지로 아주 짧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래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만날 수 있는 큐비즘 작품들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깊이 파고들어 감상하기는 더 쉽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오직 큐비즘에만 집중합니다.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 주요 작가들의 작품 91점을 모아, 전시관 전체를 큐비즘 작품으로 채웠습니다. 경험의 밀도를 한층 더 높인 겁니다. 파리 퐁피두센터에 비해 공간도, 전시할 수 있는 작품 수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오히려 역으로 활용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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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큐비즘 작품들을 이렇게 한 데 모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는 사실상 처음입니다 ⓒ기묘한

현대미술의 시작점 중 하나인 큐비즘을 첫 전시로 선보이며, 현대미술관인 퐁피두센터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물론이고요.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큐비즘을 폭넓게 다루며, 하나의 사조를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 좋은 기획이었습니다.

기교는 절제하되, 포인트는 살렸습니다

사실 모두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국내에 공개된 적 없는 수준 높은 컬렉션이었을 겁니다. 특히 피카소가 직접 제작한 대형 발레 무대막은 한국에 소개된 적 없는 작품인 데다, 그 규모만으로도 관람객을 압도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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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내 대형작품들은 확실히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묘한

피카소 이외에도 조르주 브라크, 페르낭 레제, 소니아 들로네, 로베르 들로네 등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큐비즘 전시로는 역대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전시 동선은 오히려 정석적이었습니다. 기획 전시에서는 간혹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작품의 배치나 동선에 힘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번 전시는 작품들 자체의 존재감이 워낙 커, 굳이 과한 장치를 더하지 않아도 충분했습니다.

대신 전시는 큐비즘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따라가게 합니다. 1907년 처음 큐비즘의 개념이 등장하던 시기부터 미술사적으로 주목받던 1차 세계대전 이전, 그리고 이후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은 1920년대까지 이어지는데요. 큐비즘의 탄생부터 변화까지 자연스럽게 뒤따라가며 이를 체득하도록 돕고 있었죠. 이렇게 작품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허들은 크게 낮아질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지은 책임 큐레이터는 “큐비즘은 ‘어렵다’기보다 ‘낯설다’는 점만 기억”하면 그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 수 있다고 말했는데요. 결국 이번 전시는 관람객이 큐비즘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동선부터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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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중간중간 창을 통해 이전 시기의 작품들과 이를 보는 관람객을 엿보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기묘한

그리고 여기에 살짝 변주를 준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다른 전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창들이 그 역할을 했는데요. 서로 다른 시기의 작품들이 마주 보며,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러한 배치는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시간순 동선에 리듬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모든 작품에 설명이 달린 건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이게 그거 같은데, 여기를 잘 보라니까.”

전시장을 돌다 보면 곳곳에서 이런 대화가 들리곤 했습니다.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예상치 못한 토론이 여기저기서 벌어졌죠. 큐비즘은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대상의 구조와 시간, 여러 시점을 하나의 화면 안에 담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과 작품이 의도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데 다른 전시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서는 유난히 오디오 도슨트와 QR코드가 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전시를 봐왔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설에 집중하며 작품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흔치 않았는데요. 그만큼 낯선 장면에 익숙해지기 위해 안내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거죠.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이번 전시는 모든 작품에 추가적인 해설을 덧붙여 두었습니다. 보통 미술 전시의 오디오 가이드는 주요 작품 위주로만 구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해도 그 의미를 깊게 알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죠.

하지만 퐁피두센터 한화의 전시는 모든 작품에 친절한 안내를 붙여, 관람객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스스로 해석해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비록 도슨트 해설은 놓쳤지만, 충분히 꽉 찬 관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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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에 오디오 설명이 붙은 것은 물론 AI 도슨트까지 더해져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었습니다 ⓒ기묘한

또한 단순히 일방향적인 오디오 가이드에 그치지 않고, 소통이 가능한 AI 도슨트를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습니다. 각 작품에 대해 정해진 해설을 듣는 것을 넘어, 작가나 시대에 대한 정보도 질문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애초에 전시 자체가 큐비즘이 등장하던 당시의 예술적·사회적 맥락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대적 배경과 함께 보니, 더 재미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릴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시대적 맥락에도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역시 특별 섹션 ‘KOREA FOCUS’였습니다. 파리에서 시작된 모더니즘의 흐름이 한국의 근현대 미술,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조망하는 섹션이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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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억 <6.25 동란> 1954년, 캔버스에 유채, 96 x 160 cm, 가나문화재단 소장
6.25 전쟁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적 배경과 연결되면 큐비즘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지게 됩니다  ⓒ기묘한

퐁피두센터는 현대미술 사조가 단지 예술계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계 미술사는 아무래도 우리와는 조금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죠. 이를 한국의 근현대 미술과 연결하면서, 큐비즘과 모더니즘의 흐름을 우리의 맥락 안으로 끌어온 겁니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해외 거점이 존재하는 의의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로컬의 맥락을 바탕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은 확실히 특별했습니다. 본관보다 작고, 전시할 수 있는 작품 수도 제한적이라는 조건을 오히려 독특한 큐레이션으로 바꿔낸 퐁피두센터 한화. 결국 좋은 큐레이션은 많은 것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를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큐비즘이 어렵다는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낯선 것을 새롭게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방문하신다면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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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 창작자. 매주 2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받아보는 뉴스레터 <트렌드라이트> 에서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책 <기묘한 이커머스 이야기>를 썼습니다.